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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문역 근처 완전 핫한 문화재 *딜쿠샤*..주말 예약은 한달 전에도 어림없다.
    소식/정보지 2021. 7. 27. 09:13

    ◐ 독립문역 근처 완전 핫한 문화재 딜쿠샤.

          주말 예약은 한 달 전에도 어림없다!

     

    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시대,
    요즘처럼 집과 가깝게 지냈던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어렵게 고심한 순기능이 있다면 

    너무 사소했던 일상이 지금은 아주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특히 집의 존재가 그렇습니다. 

    ▶ 100년 묵은 집이 품은 숙명

    97년 전에 지어진 옛집 '딜쿠샤'
    어느 외국인 부부의 취향이 가득 담긴 개인적인 공간인 동시에 

    역사적 흔적과 당시 사회상을 간직한 공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의도하진 않았지만 100년 가까운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외국인 손에 탄생해 조선의 광복을 지켜봤고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들의 은신처가 되어주었으며 

    정치인이 사들였다가 다시 정부 소유가 된 집.
    딜쿠샤의 운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보입니다.

    주말 관람 예약은 한 달 전에 이미 다 차 버린다고 합니다.
    코로나 시국 딜쿠샤는 조용하게 흥행 중입니다.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드라마틱한 운명을 견딘 

    딜쿠샤에 관심과 흥미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 외국인 부부의 로맨틱한 신혼집
    딜쿠샤의 주인은 일제강점기 경성에 살던 외국인 부부,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탄광개발을 위해 아버지와 조선 땅을 찾은 앨버트는 

    출장차 갔던 일본에서 메리를 만나 결혼식을 치르고 

    경성에 신혼집을 마련한 것이 딜쿠샤의 시작이었습니다.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을 뜻합니다.
    1923년 정초석을 세우고 1년 뒤에 집이 완성됐습니다.

     

    앨버트는 '테일러 상회'를 운영하며 일종의 무역업을 했다고 합니다. 

    수입해온 자동차와 잡동사니를 조선 사람에게 팔고 

    고가구나 병풍, 호랑이 가죽 등 다양한 조선 제품을 해외로 수출했다고 합니다.

     

    앨버트는 사업가인 동시에 미국 연합통신사의 해외통신원이었습니다.
    이국의 사업가 부부는 조선이 처한 역사적 현실을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앨버트는 일본의 만행을 기사로 작성해 서구권에 소상하게 알렸다고 합니다.

     

     ▶ 외국인이 집을 짓자 저주가 내렸다.
    사직터널 언덕을 다 오르고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다 보면 

    어마 어마한 은행나무가 맞아줍니다.
    딜쿠샤가 위치한 '행촌동'의 지명이 바로 이 나무에서 왔고 

    외국인 부부가 신혼집으로 이 터를 점찍은 것도 

    거대한 은행나무가 품은 풍경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 어느 날 메리는 한양 도성을 산책하다
     사직단을 한쪽으로 두고 아래로는 독립문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오르게 된다.
     그것에는 크고 멋진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 중략 ]
     그녀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중에서  "

    이방인의 눈엔 멋지게 보였을지 모르는 이곳은 

    당시 조선 사람들에겐 신성한 장소였습니다. 

    은행나무에 대고 소원을 빌었고 주변에서 샘에서 부족함 없이 물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이 이곳에 집을 짓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반발이 심했다고 합니다.
    무당이 나타나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이었을까 집이 완성되자 기묘한 일들이 생겼습니다. 
    이사 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은행나무의 가지 하나가 부러지면서 

    그 아래 있던 메리의 동생을 덮쳤습니다. 

    다행히 피해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말라리아 병세가 더 심해진 메리의 동생은 

    결국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1926년 벼락을 맞아 불이 나면서 2층 전부와 1층 반 이상이 피해를 입었고 

    집 관리인이 갑자기 죽음을 맞기도 했다고 합니다.

     ▶ 주인은 떠나고 혼란만 남았다.
    1924년 집이 완성되고 앨버트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메리 역시 이듬해에 남편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가 

    부부가 본격적으로 이 집에 살게 된 건 1930년 무렵부터 입니다.

     

     

    딜쿠샤 안에는 동서양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무역업을 하던 앨버트와 메리는 서양식 가구와 조선의 골동품을 적절히 섞어 살림집을 꾸몄습니다. 

     

    테일러 부부가 일본에 의해 추방당한 것은 1942년이었습니다. 

    3.1 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기사를 쓴 앨버트는 

    일찌감치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광복 이후 앨버트는 딜쿠샤로 돌아가기 위해 애 섰습니다. 

    미군 전 통역사로 지원해 한국 파견을 요청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앨버트는 1948년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습니다. 

    메리는 남편 유해를 들고 한국을 찾았고 앨버트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에 묻혔습니다. 

     

    앨버트가 죽고 난 후 앨버트의 동생 윌리엄이 딜쿠샤를 관리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피난민들이 딜쿠샤에 들어와 살았습니다. 

    그러다 1959년 당시 자유당 국회의원이었던 조경규가 딜쿠샤를 사들였습니다.
    1963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당시 정부는 부정 재산 축재를 이유로 딜쿠샤를 압수했습니다. 

    소유만 했을 뿐 당시 정부는 딜쿠샤에 관심이 없었다가 2017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 관람예약 1일 4회 진행 , 예약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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